Tuesday, March 1, 2011

귀히 여기는 맛 '수란채' - 서애 류성룡 종가

“우리 어머니, 최고 솜씨요? 수란채죠! 수란채”, “우리 형님이요, 뭐 다 잘하세요. 그 중에서 수란채, 불고기, 모시송편 다 맛나죠!” 딸과 동서들이 한결 같은 소리를 한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14대 종손 류영하(85)씨의 생신축하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음식에도 DNA가 있다고들 한다. 같은 송편이라도 맛이 천차만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DNA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른 손맛이 만든다.


음식 DNA부터 다른 경주 최부자집 둘째딸 
안동 하회마을에 터를 잡은 류성룡 선생의 14대 종부 최소희(83)씨는 그 손맛이 남다르다. 종손 류영하씨와 스무 살에 결혼하기 전까지 그는 경주 최부자집 둘째딸이었다. 최준 선생이 그의 할아버지다. 미식가였던 최준 선생은 맛난 음식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경성 요리집에서 맛난 것 드시면 그 요리사를 집으로 데리고 오셔서 집에서 시연을 했어요. 모두들 따라해 보고 맛도 보고 했어요”라고 최씨는 말한다. 어릴 때부터 그가 경험한 맛 세계가 예사롭지 않다. 류영하씨는 “우리 집은 그리 넉넉하지 않아 여러 가지 놓고 먹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 종부 최씨의 예민한 입맛과 섬세한 손맛이 소박하고 단아한 서애 류성룡댁의 부엌을 다채롭게 만들었다.

이름난 종가답게 이 댁에는 손님이 많다.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방문했고 2007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녀갔다. 그때 최씨가 만든 음식이 ‘수란채’이다.

수란채에 들어가는 당근

수란채는 최씨가 귀한 손님들이 올 때마다 만드는 건강식이다. 찌고 데친 각종 채소와 문어, 게살 등에 수란(물속에서 반숙 정도로 익힌 달걀)을 얹고 잣즙을 뿌려 먹는 음식이다. 최씨가 만드는 수란채에는 보들보들한 영덕대게 다리살이 들어가고 당근이 꽃모양으로 다시 태어난다.

석이버섯은 기지개를 편 아이처럼 반듯하고 수란은 보름달처럼 넉넉하게 둥글다. 한 자리 차지한 데친 미나리와 문어도 향긋한 풍미를 자랑한다. 서로 다른 식재료들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착한 맛’을 내고 있다. 숙명여대 식생활문화대학원 심기현 교수는 잣에는 비만을 예방하는 성분이 있고 대게나 문어에는 타우린이 있어 영양적인 면에서 훌륭하다고 말한다. “타우린은 피로회복과 강장효과가 있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조리법도 튀기는 것이 아니라 찌는 방식이어서 좋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저지방 고단백음식이다.


술꾼이라면 기억회로에 저장해두고 싶은 맛
종부 최소희 여사가 만든 가양주

잣이 들어가는 요리는 예부터 귀한 음식이었다. 종부 최씨는 꼭 국산 잣을 써야 맛나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이들이 만드는 수란채와 달리 미나리 등에 녹말가루를 묻히지 않는다. 수란을 만드는 방법도 조금은 차이가 있다. 국자에 달걀을 얹거나 그릇에 넣어 중탕으로 수란을 뜨지 않고 숟가락 뒤 부분으로 톡톡 쳐서 작은 구멍을 내고 물이 끓으면 천천히 달걀껍질을 깨서 넣는다. 흰자가 넓게 풀어지지 않게 숟가락으로 모으면서 반숙을 한다.

잣즙이 뿌려지는 순간 고소한 바다에 빠진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느낌이다. 그 사이로 올라오는 미나리는 씹는 식감이 쫄깃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잘 떠서 드세요. 달걀 터트리지 말고 한 입 먹고, 나머지 먹어요”라고 최씨가 당부한다. 노 전 대통령은 수란채를 먹고 흐뭇하게 “맛있다”고 했다고 최씨가 전한다.

그는 향긋한 가양주를 만드는 실력도 최고다. 제사를 지내기 한 달 전부터 빚기 시작하는데 그 맛이 오묘하다. 달지 않은 듯한데 달고, 쓰지 않은 듯한데 쌉싸르하고, 신듯하면서 시지 않은 맛이다. 신선이 조화를 부린 술맛이다. “안동시장님이 최근에도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한 병만 달라고 부탁해서 주었지요”라고 종손이 말한다.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하다. 술꾼이라면 한번쯤 꼭 맛보고 혀의 기억회로에 저장해두고 싶은 달콤한 맛이다. 찹쌀로 죽을 끓이고 누룩을 넣은 후 1차 발효를 시키고 며칠 뒤 고두밥을 넣고 다시 발효시킨다. 이불에 폭 싸서 따끈한 방바닥에 두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성냥불을 켜서 꺼지지 않으면 이불을 걷어 지꺼기를 가라앉히고 용수(술이나 장을 거르는 데 쓰는 싸리나 대오리로 만든 둥글고 긴 통)를 박는다. 제사 때마다 최씨는 이 술로 정성을 기울인다. 불고기 양념으로 만드는 닭다리나 모시 잎을 데쳐 꼭 짜고 쌀가루와 함께 버무려 빚는 모시송편도 담백한 건강식들이다.


네살배기 시동생은 부끄럼 많은 형수의 치마폭으로 숨어 들고…
이 댁은 전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종가다.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가 류성룡 선생이다. 이순신 장군을 천거해서 임진왜란을 슬기롭게 해쳐나간 조선시대 학자겸 문인이다. 최씨는 “처음에 이 댁으로 시집간다고 결정 났을 때 어머니가 걱정도 많이 하셨어요. 큰 종가라서 잘 해야 할 일들도 많아서 그러셨지요”라고 말하면서 종부로서 일들은 오히려 별로 버겁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음고생은 집안의 대소사보다 신혼 때 했다. 종손 류영하씨는 일제강점기 말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을 정도로 열혈청년이었다. 종부가 “마음고생 할 일”들이 뒤따랐다. “그 시대 지식인들은 다 그랬지”라고 종손이 회상한다.

그 옛날 최씨가 종택 ‘충효당’에 처음 왔을 때 풍경은 마치 오래된 한국영화 한편을 보는 듯하다. “시동생이 네 살이었어요. 시어머니와도 나이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마치 친자매처럼 지냈어요. 12살 차이였죠.” 어린 시동생은 부끄러움 많은 형수의 치마폭으로 자주 숨어들었다. 큰 누이처럼 키웠다. 시어머니 박필술씨는 종손이 10살 때 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종손의 아버지와 결혼한 분이었다. <명가의 내훈>이라는 책을 낼 정도로 총명하고 현명한 분이었다고 사람들은 회상한다. 종손은 한국전쟁을 겪고 난후에 성균관대학교 생물학과를 다시 들어가서 석사까지 마치고 서울에서 생물교사로 일했다. 종부는 4남매를 키우면서 서울살림을 했다. 류영하씨는 아버지가 1971년 돌아가시자 이듬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종가를 지키기 위해 고향 안동으로 내려왔다. 그는 종택 ‘충효당’을 지키면서 지금까지 사람들과 소통하는 종가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KAL기 폭발하며 잃은 큰딸, 손님으로 북적대며 고통 치유 
충효당에 가족들이 모이면 언제나 화기애애하다. 둘째며느리 문상원(52)씨는 “제사가 많기는 하지만 축제여요. 다들 모여서 음식을 만들고 나눠 먹고 웃음이 끊이지 않죠”라고 말한다. 이렇게 북적북적 사람들이 자주 모이게 된 데는 가풍의 영향도 있지만 고통을 치유하려는 의지도 있었다.

종손 부부는 큰딸가족을 대한항공기(KAL) 폭파 사건(1987년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공중폭파된 사건) 때 잃었다. 미국 코넬대학교에 교환교수로 갔던 사위가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탄 비행기가 KAL기였다.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집안에도 신이 던져주는 삶의 고통이 있었다. “전날 이상한 꿈을 꾸었지요. 딸이 같이 미국가자 고 하는 거예요, 나는 여권이 없다, 하고 가져와야겠다 했는데 꿈이 깼어요”라고 종부는 말한다. 종손과 종부는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한다. 고택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것으로 긴 고통의 세월을 이겨냈다.

충효당 안채를 찾은 이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반짝반짝 봄볕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충효당’은 전국에서 찾아온 이들로 북적인다. 두 사람은 부드러운 미소로 이곳을 찾은 이 누구라도 물 한잔 대접하면서 얘기를 나눈다. 방학 중에 우연히 이곳을 찾은 대학생 한선미씨는 “추운데 들어와요, 궁금한 거 다 얘기해줄테니”라고 따스하게 맞아주는 종부의 손에 이끌려 ‘손녀딸’이라도 된 듯 귀한 대접을 받는다. 한씨가 종부에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종부가 한마디한다. “사람에겐 무엇이든 다 중요하지” 단아한 두 사람의 풍모가 우아한 고택과 어우러져 따스하기 그지없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