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깔깔깔깔, 호호호호,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하얀 눈이 지붕과 소나무 가지마다 걸린 조용한 한옥 앞에서 사람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바쁜 걸음이다. 한겨울인데도 ‘강릉 선교장’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강릉을 여행지로 정한 이들이라면 이곳을 빼놓지 않는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이 가옥은 소박한 미와 아름다운 정원들로 인기다. 건물들을 돌아 걸을 때마다 결마다 농도가 다른 나무들이 우아함을 뽐낸다. 고개라도 바짝 치켜들라치면 배시시 웃는 아이의 입꼬리처럼 올라간 기와들이 눈에 들어온다. 봄이면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시원한 연못의 물향기가 꽃내음처럼 싱그럽다.
강릉 선교장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인 무경 이내번(1703~1781)이 지은 집이다. 이내번의 선조 완계군 (효령대군의 7대손)은 한양에서 충주로 내려갔는데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그의 아버지를 완풍부원군로 칭했다고 한다. 그 후 가세가 기울자 이내번이 모친(안동 권씨)을 모시고 강릉으로 거처를 옮겼다. 강릉은 모친의 친정이었다. 그래서 과거 이 댁을 ‘완풍종가’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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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나 재료 썰 때 몇 센티미터도 오차가 생기면 야단
들머리에 있는 기록을 꼼꼼히 읽다보면 어디선가 맛난 냄새가 난다. 이 댁의 부엌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냄새다. 거기엔 이 댁 며느리 홍주연(58)씨의 손맛이 배어 있다. 그는 둘째 며느리지만 1992년부터 강릉 선교장 8대 종부 성기희(2002년 작고)씨를 모시면서 맛을 이어받았다. 시어머니에게서 ‘두부선’, ‘전체수’ 등 담백하고 쫄깃한 집안음식의 맛내는 법을 배웠다.
홍씨는 “어머님은 엄하셨다. 무나 재료를 썰 때 몇 센티미터도 오차가 생기면 야단이셨다.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건져라, 썰어라, 알려주셨고, 내가 간을 하면 맛을 보시고 ‘됐다’ 하시면 100점이라는 소리셨다”로 말한다. 시할머니도 음식 솜씨가 좋았다. 어릴 때 기억에 오랜만에 고향집 가면 추운 겨울에도 30분이면 뚝딱 맛난 음식이 나왔다. 어머니에게 “할머니 따라 가실라면 아직 멀으셨어요”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고 선교장을 지키고 있는 차남 이강백(64)씨가 회고한다. 홍씨도 집안 여인네들처럼 뚝딱뚝딱 음식을 만든다. ‘선’이라는 요리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음식이다. ‘우리 몸에 좋은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호박이나 오이, 가지 등에 다진 쇠고기 등을 소로 집어넣고 짧은 시간 끓이거나 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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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댁의 ‘두부선’은 부드러운 두부 속에 영화 <아바타>를 담고 있다. 두부를 한 입 베어 물면 ‘나비족’의 숲에 들어선 것처럼 자연의 향이 물씬 풍긴다. 그 향취를 입 안 가득히 즐길라치면 돌연 그 숲을 종행무진 날아다니는 ‘이크란’을 만난 듯 놀라움이 머리카락 끝까지 뻗친다. 작은 덩이가 되어 콕콕 박혀 있는 쫄깃한 쇠고기와 닭고기, 석이버섯이 비상하는 기운을 뿜어내기 때문이다.
두부선 한 덩이면 화성 탐험대가 며칠 버틸 식량이 된다. 그만큼 영양식이다. “간은 소금으로만 해요, 천일염을 사다가 간수를 빼고 볶아서 써요”라고 홍씨가 말한다. “설탕도 잘 안 써요. 선교장 뒤에 있는 감나무를 이용하지요. 홍시를 소쿠리에 받쳐두면 물이 빠지는데 그것을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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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전공자답게 색색 채소와 황태보푸라기로 ‘구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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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클한 영양식이 휙 하고 입안으로 사라지자 ‘전체수’(全體需)가 나온다. ‘전체수’는 닭, 꿩 또는 물고기 따위를 통째로 양념하여 구운 적을 말하는데 이 댁은 닭다리로만 한다. 모양도 희한하다. 닭다리가 마치 발레리나처럼 보인다. 닭다리에 칼집을 내고 갖은 양념을 해서 하룻밤 재운 후에 굽고 한지로 위쪽을 싸서 먹는다. “예전에 조상들은 손에 기름이 묻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색색 한지로 손잡이를 만든 거지요.” 홍씨는 맛도 맛이지만 모양을 내는 데도 수준급이다.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이답다.
황태어장이 가까운 곳답게 황태를 이용한 음식도 많다. ‘황태구이’ ‘코다리찜’의 바삭바삭하면서 쫀득한 맛은 견줄 데가 없다. 음식이 어딘가 심심하면서 허전한 느낌이 들지만 다 먹으면 속이 편해서 부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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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색 채소와 북어보푸라기가 함께 너른 접시에 등장하는 ‘황태보푸라기 구절판’은 홍씨의 아이디어다. 치자나 녹차를 이용한 물로 절인 무에 채소들과 보푸라기를 싸먹는 요리다. 아삭아삭 숲의 한 모퉁이를 씹다가 쭉쭉 눈앞에 떨어지는 나뭇가지를 한번 밟고 상큼한 시냇물에 발 담그는 맛이다. 홍씨는 종가댁 자손과 결혼해 그 음식을 배우고 새로운 음식도 만들어 더 풍요롭게 했다. 그가 서울에서 이곳 강릉 선교장으로 내려온 것은 1992년이다. 남편 이강백씨는 효자였다. 이씨는 아버지 이기재씨가 1980년 돌아가시고 어머니 성씨가 혼자 지내면서 건강도 나빠지자 강릉으로 내려왔다. 당시 성씨는 칠순이 넘은 나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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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장꼬장하고 영특한 신식여성…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8대 종부 성기희 선생은 선교장을 지키고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꼬장꼬장하고 영특한 신식여성이었다. 친정아버지는 여자도 학문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한 지식인이었다. 충북 단양이 고향이지만 일찍 서울로 올라가 신식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를 가고 싶으셨는데 여자를 안 뽑아서 서울여의전을 가셨지요. 일본 폐망을 앞 둔 때였는데 간호원이 부족하니깐 어린 학생들까지 전쟁터로 끌고 가려고 했어요. 그 소문이 돌자 집안에서 우리 아버지와 급하게 결혼을 시켰지요.”
성기희 선생은 21살 때인 1941년 4살 위인 선교장 8대 종손 이기재씨와 결혼을 했다.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물게 하얀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성기희 선생은 33살에 3남2녀 자녀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서도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직장생활도 하면서 대학교육을 마쳤고 1974년 다시 강릉 선교장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건국대, 국민대, 이화여대 등에서 복식과 예절을 가르쳤다. 남편 이기재씨가 강릉 2대 시장에 취임하자 그 옆자리를 채우기 위해 서울 생활을 정리했다. 관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89년 차문화교류 사절단 등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등 노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한 당찬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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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등 전직 대통령들 줄줄이 발길

강릉 선교장이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개방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게 된 데에는 이강백씨의 공이 크다. “1992년에 내려왔을 때 비가 새고 기와는 떨어지고 볼품이 없었지요. 꽃을 좋아하셨던 할머니 생각에 꽃을 심고 다듬었지요.” 그는 선교장을 ‘손님이 오는 집, 사람들과 소통하는 곳’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선교장은 전통문화체험관도 있고, 한옥 체험과 전통의 맛도 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를 만들어 다른 고택들도 사람들과 함께 교류하고 소통하는 장소가 되도록 돕는다. 육순이 넘은 나이에도 밤길을 마다않고 차를 몰아 전라도, 경상도로 종횡무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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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교장 자랑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연못에 반쯤 걸쳐 있는 ‘활래정’은 연꽃이 활짝 핀 계절이면 마치 큰 숲 위에 떠있는 안락한 보금자리처럼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부터 전직 대통령들 대부분이 다녀가셨지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활래정’을 좋아하셨어요. 다리가 불편하시니깐 많이 걷지는 못하시고 돌에 한참을 앉았다가 가시곤 했지요. 정계 은퇴를 선언하신 후에 많이 다녀가셨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도 있다. “대통령을 마치시고 다녀가셨는데 강원도 마지막 여행이셨어요. 인간적인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사진 찍자고 하면 거절 한 마디 안 하시고 팔짱을 끼셨죠. 그때 다과와 차, 떡을 드시고 가셨어요.”
안채에 있는 ‘열화당’은 이곳을 찾은 문인들과 가족들이 정담을 나누는 공간이다. 출판사 ‘열화당’과 같은 이름이다. 대표 이기웅씨도 이 댁 사람이다. 지금도 강원도의 크고 작은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진다. 아름다운 고택이 주는 그윽한 미가 맛과 함께 어우러져 더욱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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