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 2011

자연향 물씬 두부선 - 강릉 선교장 종가

깔깔깔깔, 호호호호,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하얀 눈이 지붕과 소나무 가지마다 걸린 조용한 한옥 앞에서 사람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바쁜 걸음이다. 한겨울인데도 ‘강릉 선교장’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강릉을 여행지로 정한 이들이라면 이곳을 빼놓지 않는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이 가옥은 소박한 미와 아름다운 정원들로 인기다. 건물들을 돌아 걸을 때마다 결마다 농도가 다른 나무들이 우아함을 뽐낸다. 고개라도 바짝 치켜들라치면 배시시 웃는 아이의 입꼬리처럼 올라간 기와들이 눈에 들어온다. 봄이면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시원한 연못의 물향기가 꽃내음처럼 싱그럽다.

강릉 선교장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인 무경 이내번(1703~1781)이 지은 집이다. 이내번의 선조 완계군 (효령대군의 7대손)은 한양에서 충주로 내려갔는데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그의 아버지를 완풍부원군로 칭했다고 한다. 그 후 가세가 기울자 이내번이 모친(안동 권씨)을 모시고 강릉으로 거처를 옮겼다. 강릉은 모친의 친정이었다. 그래서 과거 이 댁을 ‘완풍종가’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무나 재료 썰 때 몇 센티미터도 오차가 생기면 야단
들머리에 있는 기록을 꼼꼼히 읽다보면 어디선가 맛난 냄새가 난다. 이 댁의 부엌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냄새다. 거기엔 이 댁 며느리 홍주연(58)씨의 손맛이 배어 있다. 그는 둘째 며느리지만 1992년부터 강릉 선교장 8대 종부 성기희(2002년 작고)씨를 모시면서 맛을 이어받았다. 시어머니에게서 ‘두부선’, ‘전체수’ 등 담백하고 쫄깃한 집안음식의 맛내는 법을 배웠다.

홍씨는 “어머님은 엄하셨다. 무나 재료를 썰 때 몇 센티미터도 오차가 생기면 야단이셨다.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건져라, 썰어라, 알려주셨고, 내가 간을 하면 맛을 보시고 ‘됐다’ 하시면 100점이라는 소리셨다”로 말한다. 시할머니도 음식 솜씨가 좋았다. 어릴 때 기억에 오랜만에 고향집 가면 추운 겨울에도 30분이면 뚝딱 맛난 음식이 나왔다. 어머니에게 “할머니 따라 가실라면 아직 멀으셨어요”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고 선교장을 지키고 있는 차남 이강백(64)씨가 회고한다. 홍씨도 집안 여인네들처럼 뚝딱뚝딱 음식을 만든다. ‘선’이라는 요리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음식이다. ‘우리 몸에 좋은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호박이나 오이, 가지 등에 다진 쇠고기 등을 소로 집어넣고 짧은 시간 끓이거나 쪄낸다.

선교장 음식.전체수

이 댁의 ‘두부선’은 부드러운 두부 속에 영화 <아바타>를 담고 있다. 두부를 한 입 베어 물면 ‘나비족’의 숲에 들어선 것처럼 자연의 향이 물씬 풍긴다. 그 향취를 입 안 가득히 즐길라치면 돌연 그 숲을 종행무진 날아다니는 ‘이크란’을 만난 듯 놀라움이 머리카락 끝까지 뻗친다. 작은 덩이가 되어 콕콕 박혀 있는 쫄깃한 쇠고기와 닭고기, 석이버섯이 비상하는 기운을 뿜어내기 때문이다.

두부선 한 덩이면 화성 탐험대가 며칠 버틸 식량이 된다. 그만큼 영양식이다. “간은 소금으로만 해요, 천일염을 사다가 간수를 빼고 볶아서 써요”라고 홍씨가 말한다. “설탕도 잘 안 써요. 선교장 뒤에 있는 감나무를 이용하지요. 홍시를 소쿠리에 받쳐두면 물이 빠지는데 그것을 써요.”


미술 전공자답게 색색 채소와 황태보푸라기로 ‘구절판’
황태보푸라기 구절판

뭉클한 영양식이 휙 하고 입안으로 사라지자 ‘전체수’(全體需)가 나온다. ‘전체수’는 닭, 꿩 또는 물고기 따위를 통째로 양념하여 구운 적을 말하는데 이 댁은 닭다리로만 한다. 모양도 희한하다. 닭다리가 마치 발레리나처럼 보인다. 닭다리에 칼집을 내고 갖은 양념을 해서 하룻밤 재운 후에 굽고 한지로 위쪽을 싸서 먹는다. “예전에 조상들은 손에 기름이 묻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색색 한지로 손잡이를 만든 거지요.” 홍씨는 맛도 맛이지만 모양을 내는 데도 수준급이다.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이답다.

황태어장이 가까운 곳답게 황태를 이용한 음식도 많다. ‘황태구이’ ‘코다리찜’의 바삭바삭하면서 쫀득한 맛은 견줄 데가 없다. 음식이 어딘가 심심하면서 허전한 느낌이 들지만 다 먹으면 속이 편해서 부듯하다. 

색색 채소와 북어보푸라기가 함께 너른 접시에 등장하는 ‘황태보푸라기 구절판’은 홍씨의 아이디어다. 치자나 녹차를 이용한 물로 절인 무에 채소들과 보푸라기를 싸먹는 요리다. 아삭아삭 숲의 한 모퉁이를 씹다가 쭉쭉 눈앞에 떨어지는 나뭇가지를 한번 밟고 상큼한 시냇물에 발 담그는 맛이다. 홍씨는 종가댁 자손과 결혼해 그 음식을 배우고 새로운 음식도 만들어 더 풍요롭게 했다. 그가 서울에서 이곳 강릉 선교장으로 내려온 것은 1992년이다. 남편 이강백씨는 효자였다. 이씨는 아버지 이기재씨가 1980년 돌아가시고 어머니 성씨가 혼자 지내면서 건강도 나빠지자 강릉으로 내려왔다. 당시 성씨는 칠순이 넘은 나이였다.


꼬장꼬장하고 영특한 신식여성…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8대 종부 성기희 선생은 선교장을 지키고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꼬장꼬장하고 영특한 신식여성이었다. 친정아버지는 여자도 학문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한 지식인이었다. 충북 단양이 고향이지만 일찍 서울로 올라가 신식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를 가고 싶으셨는데 여자를 안 뽑아서 서울여의전을 가셨지요. 일본 폐망을 앞 둔 때였는데 간호원이 부족하니깐 어린 학생들까지 전쟁터로 끌고 가려고 했어요. 그 소문이 돌자 집안에서 우리 아버지와 급하게 결혼을 시켰지요.”

성기희 선생은 21살 때인 1941년 4살 위인 선교장 8대 종손 이기재씨와 결혼을 했다.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물게 하얀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성기희 선생은 33살에 3남2녀 자녀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서도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직장생활도 하면서 대학교육을 마쳤고 1974년 다시 강릉 선교장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건국대, 국민대, 이화여대 등에서 복식과 예절을 가르쳤다. 남편 이기재씨가 강릉 2대 시장에 취임하자 그 옆자리를 채우기 위해 서울 생활을 정리했다. 관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89년 차문화교류 사절단 등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등 노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한 당찬 여성이었다.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등 전직 대통령들 줄줄이 발길
강릉 선교장이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개방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게 된 데에는 이강백씨의 공이 크다. “1992년에 내려왔을 때 비가 새고 기와는 떨어지고 볼품이 없었지요. 꽃을 좋아하셨던 할머니 생각에 꽃을 심고 다듬었지요.” 그는 선교장을 ‘손님이 오는 집, 사람들과 소통하는 곳’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선교장은 전통문화체험관도 있고, 한옥 체험과 전통의 맛도 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를 만들어 다른 고택들도 사람들과 함께 교류하고 소통하는 장소가 되도록 돕는다. 육순이 넘은 나이에도 밤길을 마다않고 차를 몰아 전라도, 경상도로 종횡무진 달린다.

선교장

그의 선교장 자랑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연못에 반쯤 걸쳐 있는 ‘활래정’은 연꽃이 활짝 핀 계절이면 마치 큰 숲 위에 떠있는 안락한 보금자리처럼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부터 전직 대통령들 대부분이 다녀가셨지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활래정’을 좋아하셨어요. 다리가 불편하시니깐 많이 걷지는 못하시고 돌에 한참을 앉았다가 가시곤 했지요. 정계 은퇴를 선언하신 후에 많이 다녀가셨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도 있다. “대통령을 마치시고 다녀가셨는데 강원도 마지막 여행이셨어요. 인간적인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사진 찍자고 하면 거절 한 마디 안 하시고 팔짱을 끼셨죠. 그때 다과와 차, 떡을 드시고 가셨어요.”

안채에 있는 ‘열화당’은 이곳을 찾은 문인들과 가족들이 정담을 나누는 공간이다. 출판사 ‘열화당’과 같은 이름이다. 대표 이기웅씨도 이 댁 사람이다. 지금도 강원도의 크고 작은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진다. 아름다운 고택이 주는 그윽한 미가 맛과 함께 어우러져 더욱 우아하다.

귀히 여기는 맛 '수란채' - 서애 류성룡 종가

“우리 어머니, 최고 솜씨요? 수란채죠! 수란채”, “우리 형님이요, 뭐 다 잘하세요. 그 중에서 수란채, 불고기, 모시송편 다 맛나죠!” 딸과 동서들이 한결 같은 소리를 한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14대 종손 류영하(85)씨의 생신축하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음식에도 DNA가 있다고들 한다. 같은 송편이라도 맛이 천차만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DNA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른 손맛이 만든다.


음식 DNA부터 다른 경주 최부자집 둘째딸 
안동 하회마을에 터를 잡은 류성룡 선생의 14대 종부 최소희(83)씨는 그 손맛이 남다르다. 종손 류영하씨와 스무 살에 결혼하기 전까지 그는 경주 최부자집 둘째딸이었다. 최준 선생이 그의 할아버지다. 미식가였던 최준 선생은 맛난 음식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경성 요리집에서 맛난 것 드시면 그 요리사를 집으로 데리고 오셔서 집에서 시연을 했어요. 모두들 따라해 보고 맛도 보고 했어요”라고 최씨는 말한다. 어릴 때부터 그가 경험한 맛 세계가 예사롭지 않다. 류영하씨는 “우리 집은 그리 넉넉하지 않아 여러 가지 놓고 먹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 종부 최씨의 예민한 입맛과 섬세한 손맛이 소박하고 단아한 서애 류성룡댁의 부엌을 다채롭게 만들었다.

이름난 종가답게 이 댁에는 손님이 많다.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방문했고 2007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녀갔다. 그때 최씨가 만든 음식이 ‘수란채’이다.

수란채에 들어가는 당근

수란채는 최씨가 귀한 손님들이 올 때마다 만드는 건강식이다. 찌고 데친 각종 채소와 문어, 게살 등에 수란(물속에서 반숙 정도로 익힌 달걀)을 얹고 잣즙을 뿌려 먹는 음식이다. 최씨가 만드는 수란채에는 보들보들한 영덕대게 다리살이 들어가고 당근이 꽃모양으로 다시 태어난다.

석이버섯은 기지개를 편 아이처럼 반듯하고 수란은 보름달처럼 넉넉하게 둥글다. 한 자리 차지한 데친 미나리와 문어도 향긋한 풍미를 자랑한다. 서로 다른 식재료들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착한 맛’을 내고 있다. 숙명여대 식생활문화대학원 심기현 교수는 잣에는 비만을 예방하는 성분이 있고 대게나 문어에는 타우린이 있어 영양적인 면에서 훌륭하다고 말한다. “타우린은 피로회복과 강장효과가 있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조리법도 튀기는 것이 아니라 찌는 방식이어서 좋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저지방 고단백음식이다.


술꾼이라면 기억회로에 저장해두고 싶은 맛
종부 최소희 여사가 만든 가양주

잣이 들어가는 요리는 예부터 귀한 음식이었다. 종부 최씨는 꼭 국산 잣을 써야 맛나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이들이 만드는 수란채와 달리 미나리 등에 녹말가루를 묻히지 않는다. 수란을 만드는 방법도 조금은 차이가 있다. 국자에 달걀을 얹거나 그릇에 넣어 중탕으로 수란을 뜨지 않고 숟가락 뒤 부분으로 톡톡 쳐서 작은 구멍을 내고 물이 끓으면 천천히 달걀껍질을 깨서 넣는다. 흰자가 넓게 풀어지지 않게 숟가락으로 모으면서 반숙을 한다.

잣즙이 뿌려지는 순간 고소한 바다에 빠진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느낌이다. 그 사이로 올라오는 미나리는 씹는 식감이 쫄깃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잘 떠서 드세요. 달걀 터트리지 말고 한 입 먹고, 나머지 먹어요”라고 최씨가 당부한다. 노 전 대통령은 수란채를 먹고 흐뭇하게 “맛있다”고 했다고 최씨가 전한다.

그는 향긋한 가양주를 만드는 실력도 최고다. 제사를 지내기 한 달 전부터 빚기 시작하는데 그 맛이 오묘하다. 달지 않은 듯한데 달고, 쓰지 않은 듯한데 쌉싸르하고, 신듯하면서 시지 않은 맛이다. 신선이 조화를 부린 술맛이다. “안동시장님이 최근에도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한 병만 달라고 부탁해서 주었지요”라고 종손이 말한다.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하다. 술꾼이라면 한번쯤 꼭 맛보고 혀의 기억회로에 저장해두고 싶은 달콤한 맛이다. 찹쌀로 죽을 끓이고 누룩을 넣은 후 1차 발효를 시키고 며칠 뒤 고두밥을 넣고 다시 발효시킨다. 이불에 폭 싸서 따끈한 방바닥에 두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성냥불을 켜서 꺼지지 않으면 이불을 걷어 지꺼기를 가라앉히고 용수(술이나 장을 거르는 데 쓰는 싸리나 대오리로 만든 둥글고 긴 통)를 박는다. 제사 때마다 최씨는 이 술로 정성을 기울인다. 불고기 양념으로 만드는 닭다리나 모시 잎을 데쳐 꼭 짜고 쌀가루와 함께 버무려 빚는 모시송편도 담백한 건강식들이다.


네살배기 시동생은 부끄럼 많은 형수의 치마폭으로 숨어 들고…
이 댁은 전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종가다.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가 류성룡 선생이다. 이순신 장군을 천거해서 임진왜란을 슬기롭게 해쳐나간 조선시대 학자겸 문인이다. 최씨는 “처음에 이 댁으로 시집간다고 결정 났을 때 어머니가 걱정도 많이 하셨어요. 큰 종가라서 잘 해야 할 일들도 많아서 그러셨지요”라고 말하면서 종부로서 일들은 오히려 별로 버겁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음고생은 집안의 대소사보다 신혼 때 했다. 종손 류영하씨는 일제강점기 말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을 정도로 열혈청년이었다. 종부가 “마음고생 할 일”들이 뒤따랐다. “그 시대 지식인들은 다 그랬지”라고 종손이 회상한다.

그 옛날 최씨가 종택 ‘충효당’에 처음 왔을 때 풍경은 마치 오래된 한국영화 한편을 보는 듯하다. “시동생이 네 살이었어요. 시어머니와도 나이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마치 친자매처럼 지냈어요. 12살 차이였죠.” 어린 시동생은 부끄러움 많은 형수의 치마폭으로 자주 숨어들었다. 큰 누이처럼 키웠다. 시어머니 박필술씨는 종손이 10살 때 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종손의 아버지와 결혼한 분이었다. <명가의 내훈>이라는 책을 낼 정도로 총명하고 현명한 분이었다고 사람들은 회상한다. 종손은 한국전쟁을 겪고 난후에 성균관대학교 생물학과를 다시 들어가서 석사까지 마치고 서울에서 생물교사로 일했다. 종부는 4남매를 키우면서 서울살림을 했다. 류영하씨는 아버지가 1971년 돌아가시자 이듬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종가를 지키기 위해 고향 안동으로 내려왔다. 그는 종택 ‘충효당’을 지키면서 지금까지 사람들과 소통하는 종가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KAL기 폭발하며 잃은 큰딸, 손님으로 북적대며 고통 치유 
충효당에 가족들이 모이면 언제나 화기애애하다. 둘째며느리 문상원(52)씨는 “제사가 많기는 하지만 축제여요. 다들 모여서 음식을 만들고 나눠 먹고 웃음이 끊이지 않죠”라고 말한다. 이렇게 북적북적 사람들이 자주 모이게 된 데는 가풍의 영향도 있지만 고통을 치유하려는 의지도 있었다.

종손 부부는 큰딸가족을 대한항공기(KAL) 폭파 사건(1987년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공중폭파된 사건) 때 잃었다. 미국 코넬대학교에 교환교수로 갔던 사위가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탄 비행기가 KAL기였다.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집안에도 신이 던져주는 삶의 고통이 있었다. “전날 이상한 꿈을 꾸었지요. 딸이 같이 미국가자 고 하는 거예요, 나는 여권이 없다, 하고 가져와야겠다 했는데 꿈이 깼어요”라고 종부는 말한다. 종손과 종부는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한다. 고택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것으로 긴 고통의 세월을 이겨냈다.

충효당 안채를 찾은 이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반짝반짝 봄볕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충효당’은 전국에서 찾아온 이들로 북적인다. 두 사람은 부드러운 미소로 이곳을 찾은 이 누구라도 물 한잔 대접하면서 얘기를 나눈다. 방학 중에 우연히 이곳을 찾은 대학생 한선미씨는 “추운데 들어와요, 궁금한 거 다 얘기해줄테니”라고 따스하게 맞아주는 종부의 손에 이끌려 ‘손녀딸’이라도 된 듯 귀한 대접을 받는다. 한씨가 종부에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종부가 한마디한다. “사람에겐 무엇이든 다 중요하지” 단아한 두 사람의 풍모가 우아한 고택과 어우러져 따스하기 그지없다.

메국수 나물 비빔밥 - 안동김씨 보백당종가

이것이 무슨 맛일까? 맛이라는 것이 있긴 한 건가? 쓴맛? 단맛? 신맛? 어느 한 가지 맛이 툭 튀어나오지 않는다. 먹을수록 머리속에 물음표가 늘어난다. 냉면 사발만한 그릇 한가득 있는 밥알과 나물들, 국수 가락이 수저와 함께 한참을 놀더니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한 맛은 먹는 내내 물음표를 배가시켰는데 다 먹은 후에는 뿌듯하다. 든든하다. 갑가지 삶의 용기가 몰려온다. 정글을 헤쳐나간 탐험가의 용기가 이런 것이 아닐까! 밀림을 탐험하다가 열매를 따서 목을 축이고 그 위로 양쯔강의 물줄기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맑은 공기를 담뿍 들이마신 후에 밀려오는 차분한 뿌듯함이다.


이름? 이름은 뭐, 굳이 붙이자면…
이 음식은 지난 2009년 12월 31일 (음력 12월 17일)안동 김씨 보백당 종가의 불천위(4대가 지나도 사당에서 신주를 옮기지 않고 자손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신위)제사에서 맛본 ‘메국수 나물 비빔밥’이다. ‘메국수 나물 비빔밥’은 생소한 이름이다. “종부님 이 음식이름이 뭐죠?” “이름? 이름은 뭐, 제사 지내고 난 다음 먹는 음식이지. 굳이 이름 붙이면 ‘메국수 나물 비빔밥’이 맞을려나!” 종부가 지어준 이름이다. 종부는 제사상에 올리는 국수를 ‘메국수’라고 부른다고 한다. ‘메’는 제사 때 신위 앞에 놓는 밥을 말하는데 설날에는 이 메가 떡국이 되기도 하고 추석에는 송편이 되기도 한다.

‘메국수 나물 비빔밥’은 제사상에 올렸던 5가지나물을 밥 위에 얹고 그 위에 고명처럼 메국수를 올려서 함께 비벼먹는 음식이다. “제사 음식에는 마늘이나 고춧가루를 안 넣지. 나물들도 모두 참기름과 간장이나 소금으로만 간한 것이고 국수를 비빌 때도 그렇게 하지.” 특별히 한 가지 강한 맛이 튀어나오지 않는 이유다.

보백당 불천위 제사에 올라가는 시금치

시금치, 도라지, 콩나물, 고사리, 무나물이 잘 비빈 쫄깃한 국수가락과 어울려 입안에서 모시적삼 같은 담백한 춤을 춘다. 국수는 밀가루와 콩가루를 7:3으로 섞고 참기름이나 식용유 1숟가락과 물을 넣어 반죽한다. 밀가루를 뿌려가면서 큰 홍두깨로 밀어서 면을 만든다. 콩가루의 고소한 맛이 풍긴다.

종부는 “요즘은 꼭 그렇게 국수를 만들지는 않아! 힘들기도 해서. 예전 시어머니께서는 꼭 그렇게 만드셨지만.” 밤 8시에 제사를 올리고 한참이 지난 후 늦은 밤에 먹는 음식이다. 때를 놓쳐 먹는 음식은 위에 부담이 된다. 하지만 ‘메국수 나물 비빔밥’은 힘들게 지낸 제사의 노고를 위로할 뿐만 아니라 속도 편하다. 자연의 향취를 담은 음식이다.


불천위 제사의 풍경은 기록으로 남길 유산
보백당 불천위 제사

보백당 종가는 조선초기 문신인 김계행(1431-1517)의 집안이다. 김계행의 호가 보백당이다. 고려개국공신 삼태사 한 명인 김선평의 후예다. 안동김씨 묵계파의 입향조(어떤 마을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인셈이다. 그는 젊은 날에는 성주향교, 충주향교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50세의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올라 청렴한 관리로 이름을 날렸다. 낙향해서는 송암폭포 위에 ‘만휴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묵계서원은 1687년(숙종13년)에 창건되었다. 김계행과 응계 옥고(1382~1436:세종때 사헌부 장령을 지낸 학자)의 위패를 모셨다.

나풀나풀 봄바람이 불고 새들이 노래하는 계절이 되면 묵계서원과 만휴정에는 여행객들이 모인다. 만휴정에서 내려다보는 송암폭포는 소박한 절경이다.

86세로 생애를 마감한 김계행은 당시로 보자면 장수를 했다. 종부 김정희(79)씨는 “우리 집안이 장수한 어른이 많지. 시어머니도 91세까지 사셨어”라고 말한다. 김씨도 아직까지 책을 젊은 사람들처럼 읽을 정도로 건강하다. 종손 김주현(81. 19대손)씨도 청년 못지않다. 종가는 지금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있는데 지금 살고 있는 대구와 안동을 날마다 다닐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불천위제사의 풍경은 신기하다.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필수품처럼 된 시대, 연애질하는 사진조차 달나라까지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 이 시대에 흰옷을 입은 40여명의 사람들이 제사를 올리는 풍경은 놀랍다. 마치 조선시대를 옮겨놓은 것 같다.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이나 문화재를 복원하려는 사람들이 보백당 불천위 제사를 자주 찾는다. 이날도 <사단법인 문화를 가꾸는 사람들>의 김기원 팀장이 출동해서 제사의 처음과 끝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기록으로 남기자는 차원입니다. 기록으로 남겨야 후손들도 알 수 있고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무심한 듯하지만 소박하고 정갈한 오늘날 건강식
종부 김정희씨는 21살에 종손 김주현씨와 결혼했다. 종손이 경북대학교 사범대 4학년 때다. 새색시는 종손의 졸업식날 대학교문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수줍게 서성였다. “궁금하기는 했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지”라고 그날을 웃으면서 회상한다. 세상일에 수줍은 아낙네였다. 종손이 서울에서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곁에 있었다. 휴가라도 나오면 두 사람은 ‘전쟁과 평화’ 같은 영화를 손 꼭 붙잡고 보러갈 정도로 낭만적인 신혼을 보냈다. “종가 시집와서 일이 많았어. 그때는 몰랐지, 얼마나 일이 많은지. 지금도 고개가 설레설레 해”라고 말한다.

교실 8개를 빌려 제사상을 6개나 차린 적도 있었다. 종부는 그때 절을 24번이나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나던 때도 있었다. 32살 넘어 약국을 13년간 운영했는데 “그때는 정말 즐겁웠지,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했지만 오는 사람들 인사하고 지내는 게 좋았어”라고 말한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 종손은 30년 넘게 역사 선생님으로 일했고 경상북도 교육감을 두 번 지냈다. 퇴임을 한 후에는 ‘보백당장학문화재단’을 만들어 선조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16년 전 문중사람들을 모아 돈을 모으고 지금까지 장학금을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제사가 끝나고 음복하기 위해 접시에 담은 떡

종부의 손을 거쳐 나오는 떡들은 넉넉한 인심을 담아 두툼하고 쫄깃하다. 경단, 부편, 잡과편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배추전은 싱거운 맛이 매력이다. 싱싱한 배추 잎을 따서 소금물에 잠깐 적셨다가 밀가루와 물을 섞은 것에 배추잎을 적시고 프라이팬에 굽는다. 평상시에도 자주 해먹는다. 진한 맛이 없어서 배추 자체의 아삭아삭한 맛이 더잘 느껴진다.  김주현씨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주로 채소로 음식을 많이 해주셨지요, 다시마나 해산물을 좋아하셔서 그런 요리를 잘 해주셨어요”라고 말한다. 이댁의 사람들이 건강을 지키는 비결 중에 하나다. 옛 선조들의 무심한 듯하지만 소박하고 정갈한 음식이 오늘날 건강식이다.

한식 - 공간전개형 상차림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한식
세계에 널리 알려져 사랑 받고 있는 비빔밥. 한식은 음식을 섞어서 비비고 삶고 하는 것이 유달리 많은 음식이다.

대체 우리 음식은 어떤 것일까요? 뉴욕의 어떤 음식평론가는 한식을 두고 “이렇게 훌륭한 음식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불가사의하다.”고 했습니다. 한식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발전해왔기 때문에 그 문화적 총량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 음식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계속해서 변화해 왔습니다. 그래서 전통 한식으로 생각되는 음식들 가운데에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한식의 대표 주자처럼 되어 있는 요즘 먹는 배추김치는 만들어진 지 100여 년밖에 되지 않은 새로운 음식입니다. 불고기나 삼겹살은 1960년대 이후에 생겼으니 역사가 더 짧습니다.

이와 같이 긴 역사를 갖고 있는 한식은 많은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된장이나 김치와 같은 발효음식이 특히 발전해 있는 것은 우선적으로 꼽히는 특징입니다. 발효음식은 영양이나 건강 면에서 매우 뛰어난 효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더 각광받을 음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식은 음식을 섞어서 비비고 삶고 하는 것이 유달리 많은 음식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국제적인 음식에는 비빔밥이 있고, 서민적인 음식으로는 설렁탕이나 각종 매운탕들이 있습니다. 아울러 육식보다는 채식을 선호하는 것도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고추를 사용해 매운맛을 즐기는 것도 그 특징에서 제외할 수 없습니다. 고추는 잘 알려진 것처럼 임란 이후에 일본에서 수입되었고, 그 이후 한국 음식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런 까닭에 한국음식의 대가였던 강인희 교수 같은 분은 이 이후에 한국 음식이 완성되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매일 먹는 식탁을 보십시오. 고추가 들어간 반찬이 항상 반 이상은 될 겁니다.


우리 음식은 밥을 먹기 위해 차려진다
우리 음식의 특징을 보려면 이와 같이 한이 없습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니 더 복잡합니다. 그러나 여간 해서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음식의 가장 큰 특징은 밥을 먹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을 했나요? 그러나 한식은 모든 것이 밥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비유를 든다면 밥은 왕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국은 왕비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장류나 김치는 영의정 같은 조정 대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반찬들은 그 밑에 있는 관리의 역할을 한다고 해야겠죠.

한식은 여기에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한식의 상차림은 보통 ‘공간전개형’이라고 합니다. 한 상에 다 차려놓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서양식이나 중국식은 ‘시간전개형’입니다. 이 두 가지 형식이 어떻게 다른지 금세 아시겠죠? 양식은 각각의 음식이 시간을 두고 한 접시씩 나오지만 한식은 한꺼번에 차려놓고 먹는다는 것이지요. 한식에서 모든 반찬이 다 나열되는 것은 밥과 같이 먹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음식은 밥과 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음식을 같은 공간에서 맛볼 수 있도록 차린다.

그렇게 한 상을 차려놓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수저로 음식을 먹습니다. 여기에 한식의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즉 겸상을 하는 것입니다. 상 하나를 두고 여러 사람이 반찬을 이런 식으로 공유하는 것은 다른 나라 음식 전통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물론 한국에도 외상 혹은 독상의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특별한 경우에는 외상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관리가 새로 부임했을 때 그 지역의 노인들을 초빙해 접대하는 잔치를 묘사한 것입니다.

잔치와 같은 특별한 경우에는 외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출처 : 김홍도. 기로세련계도(1804년 경)>


그런데 요즘 비싼 한정식 집을 가보면 전래의 공간전개형보다는 서양식을 따라 시간전개형으로 서빙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프부터 먹는 서양식을 따라 죽을 먼저 먹고 각각 음식을 단독으로 들다가 마지막에 밥과 국을 먹습니다. 하지만 양식의 시간전개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양식은 음식을 먹는 데 자유가 속박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한식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다는 것
한식의 최고 장점 중에 하나는 자신이 그때그때 기호에 맞게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채소가 당기면 나물이나 김치를 먹으면 되고 고기가 먹고 싶으면 생선이나 불고기를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양식은 그게 안 됩니다. 자신의 자유나 창조 정신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샐러드가 나오면 그것만 먹어야 하고 스테이크가 나오면 고기만 먹어야 합니다. 양식에서는 채소와 고기를 같이 먹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음식은 고기를 먹을 때 김치나 마늘, 쌈 등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곁들일 수가 있습니다. 고기는 전적으로 이런 채소와 먹어야 하거늘 양식은 이런 자유를 완전히 빼앗아 갑니다. 고기만 먹는 게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양식처럼 한 디쉬(dish)만 먹는 것이 서양 문화에 경도된 사람들에게는 멋있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제 눈에는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음식을 주체적으로 먹어야지 왜 주는 대로만 먹느냐는 말입니다.

물론 공간전개형인 한국 음식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음식의 온도 문제인데 음식이 항상 깔려 있으니 곧 식겠죠. 어떤 음식은 식으면 맛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 명이 같이 먹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도 있습니다. 같은 음식에 수저를 대기 때문에 비위생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특히 찌개 같은 음식을 먹을 때 여러 명이 자기 숟가락을 담그는 것은 문제가 생길 여지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단점들을 잘 고친다면 한식은 분명 경쟁력 있는 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수저를 사용하는 이유는 찌개나 국을 좋아하는 특성 때문
그 다음 특징은 먹는 도구와 관계된 것입니다. 한식은 포크와 칼을 사용하는 양식과는 달리 수저를 사용합니다. 같은 문화권에 속하는 중국이나 일본도 우리와 같이 젓가락은 사용합니다만 숟가락은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숟가락을 중시하는 이런 면도 우리 음식 문화의 독특한 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왜 숟가락을 애용할까요?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국과 찌개 때문입니다. 한식에서 국은 서양식에서처럼 반찬 급의 부식(副食)아니라 주식(主食)입니다. 한국인들은 예부터 개인적으로는 국을, 집단적으로는 찌개 먹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설렁탕이니 김치 찌개니 하는 한국인들의 애호 음식을 보면 한국인들이 국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생선회를 먹을 때에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매운탕을 끓여 먹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뜨듯한 국물을 더 좋아하는 민족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한식의 세계화는 우리 음식 사랑에서 시작한다
해외 입양인들에세 한국 전통의 맛을 전하기 위해. 접시에 비벼먹을 수 있도록 새롭게 만든 진주 논개 비빔밥.


지금 정부에서는 한식을 세계화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부터 제대로 된 한식을 먹어야 하고 많은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연구도 턱없이 부족하고 제대로 된 한식을 취급하는 곳도 많지 않습니다. 한식을 세계화하기 이전에 우리부터 우리 음식을 사랑해야겠습니다.